대중문화

Ⅱ. 시조와 하이쿠, 그리고 문화전통

mynews-365 2025. 10. 15. 19:40

 

 

 

2. 시조와 문화전통 시조는 신라시대의 10구체 사뇌가(詞腦歌 )14)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고려말 기에 완전히 정제된 시형 (詩形 )으로 나타난다. 시조는 발생초기에는 주로 신흥 사대부들에 의해 창작되었는데, 이들은 고려 중기 이후 또는 고려 말기에 성리 학을 기반으로 해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한 사람들이다. 500년 고려 귀족들이 망쳐 놓은 세상을 바로잡고자 고뇌했던 이들은 효와 충의 유학자로서 자신의 절실한 심정을 창으로써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조가 초장 ⋅중장 ⋅종장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애초 3장의 창사로 불리우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대부분이 단시조 형태이고 한자어, 관념어 사용이 많으며 종장 첫구를 상투적 감탄사로 시작하여 율격을 맞춘다. 표현상 음악적 (청각적 )이고 대부분 제목이 없는 것도 특징이다. 물론 조선 후기에 들어 와서 엇시조와 사설시조가 등장하여 형식상 좀 더 자유로워졌으며 일반 서민층 까지 확대되었긴 했지만, 시조는 엄격한 틀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상징 적으로 표현한다는 데에 본질적 요소가 강하다 .

고려가 망한 후 새 왕조에 참여한 사대부들은 시조를 재도지기 (載道之器 )로 삼아 그들의 유교적 이념을 실천했다. 이후 사대부들은 정치적 변동들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그 입지를 달리 했는데, 정쟁에서 패한 사대부들은 귀거래 (歸去 來 )해서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며 자신들의 의지를 직, 간접적으로 3 장6구에 형 상화했고, 주제도 이전의 주로 일편단심과 송축이 강호한정 (江湖閑情). 안빈낙 도 등으로 넒혀지긴 했으나 여전히 서민적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때문에 시조는 시상의 전개에 단순한 정서표현이 많다. 관념적이고 과장 된 표현도 많다. 시조 속에는 사대부로서의 사회적 책임이 잘 드러나 있다. 그 것은 집단이 지향하는 이념을 암묵적으로 시의 형식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었 다. 작게는 가족 내에서의 효가 넓게는 군주에 대한 충으로 즉 한국적 가족주의 를 확대 ⋅재생산하는 집단의식을 표출하는 집단시조인 셈이다. 사대부들의 시 조가 다양한 주제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본질은 사대부로서 나름의 성리학 적 이념과 충효의 가족주의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예를 들어 보았다 .

예1) 박인로의 조홍시가 1 수

반중 조흥감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위 시조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로 총 4수가 전한다. 살 아생전 어머님께 효도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시조이다 .

예2) 이정보 <국화와 너는 어니 >

菊花 (국화)야 너는 어니 三月東風 (삼월동풍) 다 보고 落木寒天 (낙목한천 )에 네 홀노 픠엿다 아마도 傲霜高節 (오상고절 )은 너 인가 노라 이 시조에 등장하는 국화는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로 지조와 절개를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된다. 이 시조에서도 국화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살아가는 선비의 모습을 의미한다.

 예3) 송순 <풍상이 섯거친 날에 > 풍상이 섯거친 날에 갓픠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곳인체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이 작품에서도 역시 흔히 고시조의 상투성이 보인다. 이 시조는 국화와 같이 절개를 지키는 신하가 되어달라는 임금님의 뜻을 받들어 도리와 같이 변절하는 일이 없이 충성된 절개를 지키겠노라는 작자 자신의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 라 할 수 있다 .

서리를 이기고 피는 국화의 절개에 비겨 끊임없는 자기수양의 경지를 추구 하고 음미하도록 이끌어간 내용의 작품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시조 기저에는 충, 효를 기반으로 한 ‘가족주의’적 사고, ‘우리의식’이 강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