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문화인물

Ⅱ. 문화인물로서 강금종의 재조명

mynews-365 2025. 10. 29. 19:47

 

 

 

 

 

1. 역사자원으로서 강금종

  강금종은 일본 오사카에서 ‘계림동지회’를 조직하여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940년 5월 초 대판 니혼생명보험회사 외교원인 김봉반(金奉班)이 항일 독립운동단체 결성에 뜻을 두고, 김병목(金丙穆)·고봉조(高奉朝)·강금종·한만숙(韓萬淑) 등 니혼대 학(日本大學) 전문부에 유학 중인 학생들을 규합, 조선독립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제반 연구를 목적으로 흥아연구회(興亞硏究會)라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 뒤 이들은 같은 달 26일 흥아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국독립 탈환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체인 계림동지회를 조직하였다. 정치이론연구부·사상이론연구 부·문예종교연구부·세계동향연구부를 두어 독립운동에 관한 제반 정세를 분석, 연구 검토하였으며, 회원 간의 민족의식 앙양 및 단결을 도모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전).

  계림동지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대로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조직으로 활 용되었다. 비록 많은 수의 조직원과 활동자금 등은 없었으나 이 모임은 회합을 계속하 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이념을 구체화시키고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키워나갔다.

  "김봉각 동지의 정치이론은 군국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 의 뭇솔리니 역시 군국주의와 동등한 파시즘으로 그들이 이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춰야 한다는 열변이었다. 우리 한국이 독립되면 먼저 민주주의의 토대 아래 36년간이나 쇠사 슬에 묶였던 그늘진 민족에게 자유를 안겨주자는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사상이론을 맡은 나는 계급적인 막스 이데올로기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잔인무도한 인간 이하의 집단체라는 것을 공박했다. 그러하면서 한국이 독립되면 손문 (孫文)의 삼민주의를 택하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밖에 김병목 동지의 문 예와 종교에서는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의 인생론과 그의 종교관을 체계적으로 술회 하였고, 세계 동향을 맡은 고봉조 동지는 미묘하게 전개되는 동향을 샅샅이 꼬집어 내기 도 하였다(강금종, 1985:53)."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강금종은 세종시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서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반면 이러한 관점에서 세종시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 물로서 지역문화콘텐츠로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강금종은 세종시를 대표하는 문 화자원, 문화적 소재, 계림동지회 관련 업적, 문필 활동 등의 가치를 대중에게 이해시 킬 수 있는 효과적인 지역문화 혹은 역사문화콘텐츠인 셈이다. 우선 강금종의 연대기적 행적과 사건 그리고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강금종의 연대기에서 특징적인 점은 식민지 조선이 아닌 제국주의 본진 일본에서  ‘계림동지회’를 통한 독립운동, 그리고 귀국 후 지방 문예지 창간 및 창작 활동이다. 이 러한 강금종의 행적은 사상적 배경, 관련 사건 및 인물 등을 통해 재조직될 수 있다.

  강금종의 주변 인물은 크게 ‘계림동지회’와 ‘백수문학회’의 참여 인물이 중심을 이룬 다. 이것으로 본다면 강금종은 독립운동가와 문인 등의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이 를 위해 어떠한 인물로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현재 강금종에 대한 남아있는 기록이나 관련된 증언의 수집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동시에 유족이나 유품, 작품 등의 수집 및 발굴을 통해 그 증거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계림동지회’의 경우 참여 인물이 다양하고 계보와 이후 활동 등도 복잡하기 때 문에 이들 자료를 통해 강금종의 ‘캐릭터’는 보완될 수 있다. 오사카 일대전문학교(日大 專門學校) 학생 민족주의 비밀결사체였던 ‘계림동지회’ 사건은 당시 오사카 한국인 사 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다. 특히 이 결사체의 구성원으로 일경에게 체포된 14 명의 학생이 대부분 ‘일대 오사카 전문학교’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강금종 의 육필 수기 ‘외로운 승리자’의 일부로 이 수기를 통해 그가 독립운동가로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나의 항일 사상은 내 나이가 꽤나 어릴 때 홀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일본인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을 하면서였다. 한국인 학생이 한 반에 기껏해야 두어 사람이 끼 어 있을까 말까 한 외로운 이방인으로서 그들에게 경멸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 다. 경멸을 당하는 것은 그들보다 성적이 뒤져서가 아니라 식민지 정책에서 비롯된 민족 적인 차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자리건만 독립운동을 지향한 결의와 신념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다. 각종 일본인 공장에 나가는 청소년과 부녀자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면 서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주는 착취와 압박이 얼마나 크나큰 가를 일깨우며 독립심을 심 어 주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우리들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얼마 안 되는 정성어린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잘 싸워달라는 부탁을 하는 바람에 우리들은 손과 손을 맞잡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강금종, 1985:42)

  “금종아, 어쩌려고 그랬니. 너 하날 훌륭하게 키우려고 어머닌 삯바느질을 하고 있잖 으냐, 응? 어머님은 내 손을 꼭 붙잡고 눈물을 흘리시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울고 말았다. 넌, 이제 학교에 못 가잖아. 가면 큰일 나잖니.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 어이구, 내 자식 금종아! 어머님, 염려 마세요. 학교엔 안 나가겠습니다. 고학으로 공부해서 중학교에 들어가겠 습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강금종, 1985:45)."

  강금종의 육필 수기를 통해 독립운동가, 문인 등으로 강금종을 재조명하는데 여러 사건을 플롯 단위로 구체화시킬 수 있으며, 분절된 플롯은 이후 강금종 문화콘텐츠의 중요한 테마들이 된다. 또한 강금종이 독립의식을 갖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모임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한국 학생들에게 모국어인 조선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부 터인데, 이는 한글 도시인 세종시에서 각별하게 눈여겨 볼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강 금종은 졸업생 30여 명이 각기 자기소개를 하면서 우리말을 쓰는 사람이란 열 사람도 되지 않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강금종은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는데 재판 과정에서 일본 판사의 판결문에 서조차 그의 독립의식은 확연하게 나타난다.

  “피고 강금종은 일본국이 한민족에게 주어진 강압과 착취에 불만을 품고 독립기구인 ‘계림동지회’를 결사했다. 독립군 동지들로는 김봉각, 일본대학 재학생인 김병목, 한만숙, 부두전, 고봉조 등 모두 6명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다. 특히 강금종은 조선인 학우회 위원이라는 것을 미끼로 그들을 대거 포섭하여 한민족의 자유와 행복은 일본 천황의 통 치하에서 이탈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굳건한 투지로 일관해 온 자로서 피고 강금종에게 치안유지법 제5조 제55항에 의해 징역 3년을 구형한다.”(강금종, 198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