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2년 형의 감옥 생활에서 얻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본의 그 유명한 나쓰메와 심사끼, 구니끼다, 오사끼, 도미따 등의 작품을 읽을 수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톨스토이의 ‘인생론’에 펄벅의 ‘대지’ 등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 여러 책자 중에서 가장 감회가 깊게 읽은 것은 톨스토이의 ‘인생론’과 펄벅의 ‘대지’였 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인생론’에서 정치성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모럴’과 종교의 중요 성을 강조했다. 전쟁을 증오하면서 어떤 류의 박해라도 물리치고 박애 정신에 입각한 세 계평화를 누리자고 외쳤다. 펄벅의 ‘대지’도 그렇다. 수억 중국인들이 기아에서 허덕이는 참상을 펄벅이 목격한 대로 아무 과장이나 가식 없이 엮은 것이다. 직접 피부로 느낀 바 를 그대로 실감있게 그릴 수 있었고 따라서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내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나의 인생관, 나의 문학에 대한 기본 자세와 종교 면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뉘우치게 하였다. 법과가 전공이었던 내가 오늘날 작가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첫 동기로 감옥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강금종, 1985:55)
수감생활 중 문학에 눈을 뜬 강금종은 이후 운명처럼 문인의 길에 들어선다. 특히 세종 지역의 문학사에서 강금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지역 문학지인 ‘백수문학(白樹文 學)’을 창간한 것이다. 1955년 10월 9일 한글날, 조치원역 앞 ‘승리 다방’에서 서영석, 백용운, 강금종, 박린, 동우근, 홍순태, 홍재헌, 유대식 등은 ‘백수문학동인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1956년 3월 28일, ‘백수문학’은 창간호가 발행되고 반 연간 정기 간행물 변경을 거쳐 현재는 계간지로 발전한 종합 문예지가 되었다. 이 문학회의 초대 회장이 강금종 이었다. 문학회 명칭인 ‘백수’는 ‘깨끗이 자라는 나무’를 뜻하며, 세종 지역의 대표적인 복숭아 꽃잎이 피기 전 나무의 빛이 하얀색이어서 지역 상징으로도 적절하다는 의견에 서 비롯되었다. 세종 지역문학의 본류인 ‘백수문학’은 이로써 지역문학의 역사가 되었다. 단일 장르’ 의 문예지로 시작된 우리나라 동인지들은 창간 후 얼마 가지 못한 채 대부분 폐간되었 다. 반면 지방 소읍(小邑) 조치원에서 동인지로 출발한 백수문학이 60여 년을 이어온 것은 우리 문단사(文壇史)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김동리, 구상, 정을병, 이 문구, 이호철, 황금찬 등 우리나라 문단을 대표하는 수많은 문인들이 백수문학의 회원 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백수문학으로 등단한 지역 문인들이 중앙문단으로 진출한 사례 도 적지 않다.
조치원에 정착한 강금종은 문인으로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55년에는 대전 방송국에 ‘아내의 입장’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59년에는 충북신보 신춘문예에 동화 가 당선, 68년 충남도 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1980년 월간중앙 논픽션 공모 입선, 대전 일보 수상 등 문학적으로 큰 문흔(文痕)을 남겼다. 예를 들어 초기 작품 ‘혈맥(血脈)’은 독자를 소설에 참여시켜서 함께 전개해 가는 매 우 독특한 플롯을 지녔다. 마치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사건을 전개해 가면 독자들이 작품 속 인물의 변화를 채워나가는 구성은 당시에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의 참여적 영상 읽기’라는 문학적 성취를 보인다. 또한 술에 찌들어 가는 남편과 살아가는 아내의 이야기인 ‘아내의 이장’, 신분을 초 월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 ‘약혼반지’, 꿈을 꾸는 듯한 기법으로 병든 남편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내의 내면 ‘흉조’, 어린 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나타낸 ‘어린 것의 죽음’, 마을에서 발생한 화재를 계기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전과자의 이야기 ‘참회’, 생존의 극단을 성찰하게 하는 ‘식모’, 궁색한 생활과 찌든 일상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어느 일 요일’, 굿의 진실과 허상을 보여주는 ‘무녀’, 무명작가의 일상적 고초와 시련을 통해 당 시의 문화 현실을 보여주는 ‘명세의 고백’ 등 일상의 주변과 하층민의 삶을 소재로 이 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강금종 문학의 특징이다. 이로써 그를 문학의 길로 이끈 톨스토이와 펄벅의 영향을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인 생론’에서 인간 본연의 ‘모럴’을, ‘대지’에서 박애와 인민에 대한 애정을 깨닫게 되었고 이는 줄곧 강금종 문학의 토양이 되었다. 특히 두 코주부의 대결을 통해 화합을 상징 하는 ‘코와 술’은 강금종 문학의 압권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이 씌어진 1956년은 해방 과 분단으로 남북의 동란이 발발하고 휴전이 성립되어 극도의 대치가 진행되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극도의 대립을 코주부의 감상적 방법으로 보여줌으로써 식민지 조국을 치열하게 살아냈던 작가의 소망을 가장 이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강금종의 문체는 현학적이라기보다는 쉽게 읽히는 편인데다가 평이한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인간적 문제에 천착했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성공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 나 강금종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문학세계에 대해 끊임없는 정진으로 영면하기 직전 1990년까지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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