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시조와 하이쿠의 사례를 보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까마귀’라는 시 적 대상에 대한 작자의 생각이 너무나 대조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1) 가마귀 싸우는 골에/ 정몽주어머니, 청구영언(靑丘永言)
가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白鷺)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淸江)에 됴히 씨슨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쓰러져가는 고려의 운명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애쓰는 아들 정몽주를 위해서 지었는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으로 하여금 잔치를 베풀어 정몽주를 초대할 때 그에게 지어준 어머니의 노래이다. 시대가 바뀌어 나라를 지배하는 새로운 탐욕의 무리와 변절한 자들 사이에서 곧은 지조와 의리를 갖춘 사람이 자칫 휩 쓸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자신의 다짐도 새롭게 하고 있다. '까마귀'와 '백로 '의 대조로 소인과 군자를 비유하고 있으며, 끝까지 군자로서의 삶을 지켜가려 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예2) 가마귀 검다 하고/ 이직(李稷), 청구영언(靑丘永言)
가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것치 거믄들 속조차 거믈소냐 아마도 것 희고 속 검을손 너뿐인가 하노라.
고려가 망하자 고려 유신들은 절의를 지키며 초야에 묻혀 망국의 한(恨)과, 새 왕조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이에 새 왕조에 가담한 이들은 자기 합리화와 정당성을 작품으로 나타냈다. 고려 왕조가 망한 뒤 일부 고려 유신들은 절의를 지키며 새 왕조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새 왕조 에 가담한 자들도 있었다. 이 작품은 조선 건국의 개국 공신이며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의 작품으로 새 왕조에 가담하여 두 왕조를 섬기게 된 자신의 자기 합리화와 정당성을 노래했다.(자신을 검다 하고 비웃지만 실상 겉이 희고 속이 검은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예3) 뉘라셔 가마귀를 검고/ 박효관(朴孝寬), 화원악보
뉘라셔 가마귀를 검고 흉(凶)타 하돗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긔 아니 아름다온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허하노라 까마귀를 제재로 하여, 그것이 상징하는 효(孝)의 미덕이 지켜지지 않는 세 태를 한탄하고, 효의 실천을 권고하는 교훈적인 작품이다.
예4) 올해 댜른 다리/ 김구(金絿), 자암집
올해 댜른 다리 학긔 다리 되도록애 거믄 가마괴 해오라비 되도록애 향복무강(享福無彊) 하샤 억만세(億萬歲)를 누리소셔
오리의 짧은 다리가 학처럼 긴 다리가 된다는 것과, 검은 색의 까마귀가 하얀 백로가 된다는 것은 모두가 불가능한 일로, 과장된 표현들이다. 그러나 그만 큼 임금이 무궁한 복을 누리고 오래 오래 다스려 줄 것을 바라는 작자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예5) 선경(禪境)/ 한용운(韓龍雲), 유심 2001년 겨울호
가마귀 검다 말고 해오라기 희다 마라 검은들 모자라며 희다고 남을쏘냐 일없는 사람들은 올타글타 하더라
‘선경(禪境)’은 이직(李直)의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쏘냐? 겉 희고 속 검은 짐승은 너뿐인가 하노라’의 시조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어리석고 일없는 사람이 옳고 그름의 시비를 일삼는다고 읊은 것이다.
예6) 마른 가지에 까마귀 앉아 있네 저무는 가을 -바쇼
뜻이 상반되어 있는 까마귀라고 해도, 시조 속의 까마귀들은 바쇼 하이쿠의 까마귀와는 아주 다르다. 바쇼의 까마귀(사물)는 가을 저녁(시간)이라는 어떤 순간과 마른 나뭇가지라는 특정한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까마귀이다. 자연 물을 매개로 해 개인적 정서를 여운을 남긴 채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 듯 최 대로 축소시킨 바쇼의 그 까마귀는 사진을 찍는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예7) 못자리의 판 보고 있는 숲의 까마귀 -시코
못자리판이라는 기고(季語에) 의해 저무는 가을은 봄날로 변한다. 이미 이 까마귀는 마른 가지의 까마귀가 아니다. 춥고 쓸슬한 이미지와는 달리 따스함 과 생명력에 넘쳐 있는 까마귀이다. 요컨대 하이쿠의 의미는 절대적인 관념(이데올로기)에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간/장소/사물의 관계에서 의미를 갖는다. 즉 효를 상징하거나 반대로 악을 상징하는 까마귀는 가을 저녁이든 여름 대 낮이든 혹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든, 지붕위에 앉아 있든 그 개념에 아무런 변화 를 주지 않는다. 이념적인 까마귀는 단지 그것이 선인가 악인가 하는 가치판단 에 의해서 좌우된다. 그런데 바쇼는 ‘때’와 ‘장소’를 변화시킴으로써 가마귀의 의미를 바꿔주고 그로인해 이념의 덫에서도 자유로워지며, 관념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하나의 독립된 사물로서의 얼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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